2020년 6월 21일 일요일

소개팅 -2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 빈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인상 좋게 웃고 있던 아가씨는 온데 간데 없었다. 두 눈이 텅 빈 여인이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쪽은 그런 사람 없었어요?"

"있었죠. 아니 있어요."

"그렇군요…"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자작을 했다. 나도 자작을 했다. 우리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자작을 하고 한 번에 비워내고 또 자작을 하고 원샷을 하고 또 자기 잔에 스스로 따르고 바닥을 비웠다. 둘 다 말이 없었고 서로의 잔만을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잔인가에 겨우겨우 이자리가 소개팅 자리인 것을 기억하고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아무 이야기나 지껄여 보았다.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했을까요? 언젠가는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 커피숍에서의 기분 좋은 분위기로 되돌리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숍에 있었을 때처럼 기분 좋은 목소리도 흐뭇해지는 눈웃음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취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메마르고 황폐해져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은 만날 자신이 없었을 거에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비교하게 될 테니 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3년이 지났다. 처음엔 인정하지 못하였지만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3년 전에 헤어진 그녀를 잊을 수 없다. 모든 여자를 볼 때 그녀를 기준으로 평가 한다. 그녀와 닮아서 싫다. 그녀와 닮지 않아서 싫다. 그녀가 생각나서 싫다. 그녀의 버릇과 똑같아서 싫다. 그녀처럼 웃어서 싫고 그녀처럼 웃지 않아서 싫다. 그녀처럼 다정해서 싫고 그녀처럼 다정하지 않아서 싫다. 그녀처럼 행동해서 싫고 그녀처럼 행동하지 않아서 싫다. 열다섯 번의 소개팅에서 단 한 명도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열다섯 번째의 소개팅에서야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다들 그렇다고 해서 나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보내주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다. 말 그대로 쿨 하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3년이나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녀를 붙들고 있다. 그녀와의 추억을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기억난다. 그녀의 모든 것이 이미 내 무의식 속에 박혀있다.

그리고 내 눈앞의 그녀 또한 그러하였다. 사랑하던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헤어진 연인을 비교해 보았을까?

나와 그녀는 말없이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술이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워내는 약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예전에 사귀던 연인과 비교하며 아무 이유 없이 퇴짜를 놓을 것이 뻔한 무의미한 소개팅임을 알면서 나가듯이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산 위에 돌을 가져다 놓아 보았자 다시 굴러 떨어져서 헛수고가 되어 버려도 계속 돌을 굴려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처럼 그렇게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미친 짓이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보내고 잊어버리고 지워 버려야 한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언제까지 헤어진 연인의 그림자와 추억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젊고 창창하다. 헤어진 연인의 그림자에게 갇혀 우울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러고…힉…그러고 싶취 아나 힉…나…난 시러...힉…난 더 조응 사랑을 차즈꺼야 힉…"

어느 순간 말도 제대로 안 나올 만큼 취해 버렸나 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흑…흑…흑…흐어어엉 이 나쁜 새키야 왜 왜 흐엉엉엉 왜 갔어 왜 엉엉 갈려면 다 가지고 가지 왜 기억은 남기고 가 엉엉엉"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짜증을 폭발시켰다. 여자가 우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3년 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질 때 그녀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왜? 왜? 자기가 떠나겠다고 해놓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떠나겠다고 해놓고, 왜 자기가 우는 건가? 그때 울어야 할 사람은 여자 친구가 아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되려 자기가 울다니… 내가 아직도 3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를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그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 그녀가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꼴 보기 싫다. 여자가 우는 것은 정말 꼴 보기 싫다.

"힉…이 시파…울지마 힉…왜 우러! 힉…울고 시푼건 다름 아닌 힉…나라구 나! 힉"

"엉엉엉엉 나쁜 새키야 엉엉 나뿐 노마 엉엉 나쁘은…우욱 우욱"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더니 이내 바닥에 보기 좋게 빈대떡 한판을 부쳐 놓았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자 주인 아저씨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다. 멋쩍게 씩 웃어주고 그녀의 옆으로 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토악질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을 더 게워내더니 *마트 피자 한판을 만들고 나서야 멈추었다.

옆에서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보려 했지만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주소를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나쁜 새키 나쁜 놈뿐이었다. 주인 아저씨의 도끼눈 시선이 무서워서 일단 그녀를 업고 가게를 나섰다. 완전히 술에 취한 그녀를 데려갈 곳은 주변의 모텔뿐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업어본 사람은 그 돌부처를 업고 가는 전래동화속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가벼워 보인 그녀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낑낑대며 겨우겨우 모텔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녀를 내려놓자 갑자기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온몸이 땀범벅이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눈꺼풀이 감겼다.

꿈.

꿈이었다.

꿈이 아니라면 3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부드럽게 천천히 쓰다듬었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데 그녀는 조용히 내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침대에 다시 눕혔다. 조용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얼굴을 쓰다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참지 못한 나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선희야…"

그 말이 도약선이 되어 불이 붙었다. 그녀의 입술은 바로 내 입술을 덥치듯 겹쳐왔고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놓아주지 않을 생각으로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사랑했던, 5년 넘게 사랑했던, 그리고 떠난 후에야 놓친 것을 후회한 그녀가 내 품에 다시 안겼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구석구석 빠짐없이 어루만졌다. 새끼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키스하였다. 다시 한 번 그녀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이름을 불렀다.

"선희야…"

"진수씨…"

꿈결처럼 몽롱한 기운 속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를 품에 안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가 각인되어 더 이상 떠나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3년간 참은 욕정에 3년 동안 끓인 감정이 더해져 하늘을 올랐다. 그녀를 으스러져라 껴안으면서 폭발하였다. 몽롱한 기운에 사정을 하고 나니 더욱더 잠이 쏟아졌다.

"하아…하아…진수씨…그거 알아요? 나 당신 이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당신이 왼손잡이도 아닌데 커피 마실 때만 왼손 쓸 땐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소개팅 자리가 갑갑하다고 술 마시러 나가자고 할 땐. 혹시 그이가 성형 수술을 하고 나를 속이러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마저 했어요. 심지어 동동주 마시러 온 것 마저 똑같았으니까요."

"제 이름을 불렀을 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 신기한 우연이네요. 당신과 헤어진 연인의 이름도 제 이름과 같은가 봐요."

"하지만…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당신의 그녀가 아니구요."

"당신은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남자 중 제일 괜찮은 사람 같지만 난 당신과 만날 자신이 없어요. 당신을 만난다면 그 사람의 기억을 잊어버리기는커녕 그 사람의 흔적을 찾을 것만 같아요."

"먼저 갈게요. 잘 자요."

볼에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그리고 조금 후에 문소리가 났다. 그것이…가장 기억에 남는 소개팅이었다. 뭐 당연히 애프터 신청은 없었다. 전화번호야 소개 받기 전에 받아 놓았지만 연락하지는 않았다.

6달 후.

그 소개팅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의 소개팅을 더 나갔다. 역시나 별반 소득은 없었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한다고 해서 바로 잊어버려지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은 쉽게 되지 않았다.

그날도 커피숍에 앉아서 소개팅을 하고 있었다. 상대 아가씨는 명품을 아주 좋아하였다. 그녀는 그 명품들과 그 명품을 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쉬지 않고 말을 하였다. 덕분에 나는 말을 거의 하지 못한 채로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자랑은 끝이 없어서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대각선 방향 테이블에서 피자 한판의 그녀를 발견하였다. 때마침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시선도 나와 마주쳤다. 픽! 그녀도 나도 동시에 웃어 버렸다. 그녀도 소개팅 하는 상대의 말이 지겨웠는지 입을 가리고 하품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짧은 시선에서 여러 가지 말이 오갔다.

그때 잘 들어갔어?

응.

소개팅?

응, 그쪽도?

응. 그런데 정말 말이 많네.

응, 이쪽도.

시선을 돌려 눈앞의 소개팅녀에게 말을 했다.

"제가 말이 좀 없죠? 사실 술이 좀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는 편이에요. 술 마시러 갈래요?"

"네? 지금요? 아니 아직 시간이 좀"

"저녁 먹기엔 더 이르자나요. 자 일어나세요. 가죠."

"네? 아…아니 죄송해요. 저 약속이 있어서 술은 안 될 것 같네요."

"아…그래요? 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네 미안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소개팅녀는 약간 황당하고 화난 얼굴로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피자 한판의 그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동동주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잘 안 되네

그녀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그게 될 리가 없자나.

손가락으로 잔을 잡는 시늉을 하면서 입으로 가져갔다.

동동주 마시러 갈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커피숍을 나와서 담배를 한 까치 물었다. 한대 거의 다 필 즈음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서 담배를 빼앗아서는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꺼버렸다. 그녀였다.

"몸에도 안 좋은걸 피고 있어."

"이게 몸에는 안 좋을지 몰라도 정신 건강에는…"

"그만~"

그녀는 약간 씁쓸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하긴 담배 피는 남자의 변명은 거기서 거기일 테니 그녀의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이야기를 했겠지.

"생각나?"

"응…뭐야 왜 반말 하는 거야?"

"선희…아니 그쪽이 먼저 반말 했거든요?"

내가 이름을 부르다 잠깐 멈칫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동동주나 마시러 가자."

"그래 이번엔 또 그때처럼 토하지 말고"

그녀가 눈을 흘기며 찌릿하니 쳐다보았다. 마주보며 웃어주면서 팔짱을 끼라고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끼워 왔다.

나와 선희…아니 피자 한판의 그녀는 나란히 동동주 집을 향해서 걸었다.

모르겠다. 이 인연이 어떻게 될런지는. 그저 헤어진 연인의 채취를 가장 잘 기억해 낼 수 있는 상대끼리 만나서 옛 추억을 곱씹으며 새로운 사람에게 상처 입힐지 아니면 옛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사랑을 만들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추억의 동굴 속에 쳐박혀 옛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새로운 집착거리를 찾아서, 나와 그녀는 그렇게 동동주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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